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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심리학자, 정산분석학의 창시자)

by Market Winners Club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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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년 5월 6일 ~ 1939년 9월 23일)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 통하여 정신 병리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성욕을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로이 정의하였으며,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정이의 이론,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등 치료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초기 뇌성마비를 연구하기도 했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프로이트의 방법과 관념은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일부 사회과학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전기

의과대학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법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다윈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을 읽고 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다윈주의자였던 카를 클라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 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당시 뱀장어의 생애 주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프로이트는 트레에스테의 오스트리아 동물학 연구소에서 4주간 지내며 수컷뱀장어의 생식 기관을 연구했다. 그는 뱀장어 수백 마리를 해부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고, 1876년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 보고서에 실린 그의 첫 논문 "뱀장어의 정소"에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바꾸게 된다.

1874년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빌헬름 폰 브뤼케는 그의 저서 '생리학 강의'에서 '정신역학'의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하나의 역학계이며,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급진적인 개념이었다. 그 당시 브뤼케는 빈 대학교 의과대학 1학년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임 교수였는데, 프로이트는 그의 "역학적"생리학을 받아들였고, 정신 및 정신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역동적 심리학이 여기서 출발하였다. 존 보울비에 따르면, 화학과 물리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모델은 브뤼케, 메이네르트, 헤르바르트, 브로이어, 헬름홀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1879년 프로이트는 1년간 의무 군 본무를 수행하고자 연구를 잠시 접어두었으며, 1881년에 논문 '하급 어류종의 척수에 관하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1885년 10월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공동 연구를 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는 이때 파리에 체류하면서 신경학 연구가 금전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신병리 치료로 진로를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하였으며, 청중을 앞에 두고 히스테리 환자를 대상으로 최면 기법을 자주 시연했다.

 

1886년 프로이트는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작 베르나이스의 손녀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하고, 자신의 신경과 진료소를 차린다. 프로이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했으나 치료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환자와 본인의 문제에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썼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대화의 목적은 환자가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무의식에 갇힌 강력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어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명명하며 억압이 정신에 해를 끼치며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정신체층(심신증)'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화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대화기법'이란 용어는 원래 프로이트 동료인 요제프 브로이어가 진료하던 환자인 안나 O. 가 만들었다.)

 

40대가 된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했으며 그밖에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과 기억 인격발달의 변천을 탐색하는데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896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또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비엔나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을 출간한 이후에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카를 융으로 원래 프로이트를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프로이트 또한 융이 관심을 갖고 연구한 종교와 신비주의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말년

1930년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독일어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과테 상을 받았다. 3년 뒤에 나치가 독일에 집권하면서, 유대인인 프로이트의 책은 맹공격을 받아 상당수가 불태워졌다.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비엔나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들끓었다. 프로이트는 거주하던 집에 비밀경찰이 들이닥치고, 비엔나 정신분석학회는 해산당했으며, 프로이트는 책과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게 죽기 위하여' 망명길에 오르며 가족과 함께 1938년 6월 비엔나를 떠나 런던 햄프스티드의 20 메어스필드 가든스, 현재의 프로이트 뮤지엄으로 이주하였다. 스위스 코티지 근처에 벨사이즈 길과 피츠존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 그의 동상이 서있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프로이트는 구강암 때문에 생전에 30번이 넘도록 수술을 받았다. 1939년 9월에 그는 의사이자 친구인 막스슈어를 설득하여 자살을 돕도록 하였다. 프로이트는 미완선 원고 < 정신 분석학 개관>을 남겨두고 1939년 9월 23일에 죽었으며 죽은지 사흘 뒤에 그의 유해는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도묘지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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